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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제목 미선나무 _ 야생화편지 28.
작성자 서산교차로
등록일 15/04/10(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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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스런 그녀의 이름은 ‘미선’

 

이렇게 꽃비가 내리는 봄날에는 그녀가 보고 싶어 안달이 납니다. 카메라를 챙겨놓고 길을 나서려고 하자

유리컵 위에 올려놓은 양파의 뿌리가 길게 늘어진 것처럼 유리창을 타고 굵은 빗줄기가 흘러 내렸습니다.

어제 꽃소식을 전해준 어느 여인으로부터 전화를 받은 이후 마음이 급해집니다. 지난 해 조금 늦게 도착해서

시들은 꽃밖에 보지 못해 아쉬움이 많았는데 이번에는 피어있던 꽃들이 세찬 비바람에 떨어질까봐 조바심이 납니다.


빗줄기는 더 굵어집니다. 차를 마셔볼 양으로 가스레인지 위에 물을 조금 채운 투명 주전자를 올려놓지만

시선은 자꾸 창밖에 머물러 있습니다.


평소 같으면 비가 내리는 창밖의 풍경을 감상하며 한수산의 ‘겨울 나그네’에 나오는 소설 속의 남자 주인공처럼

우아하게 한 잔의 차를 마실 텐데 지금은 그럴 여유가 없습니다.


지난 봄이었습니다. 때를 맞추지 못한 나는 다 시들어가는 ‘미선’을 만났습니다. 대부분 꽃잎은 땅에 떨어져 있었고,

몇 개의 꽃은 색이 퇴색된 채로 가느다란 가지에 매달려 있었지만 은은한 향기만큼은 간직하고 있었습니다.

나는 그 자리에 꿇어앉았습니다. 군 입대를 하면서 돌아서야 했던 첫사랑 ‘미선’이란 여인과 이름이 같은 시들은 꽃을 만나면서

왜 그녀의 슬픈 얼굴과 겹쳐 보였는지 나는 알 수 없었습니다.

 


 

 
빗줄기가 가늘어지자 얼른 차를 몰고 그녀를 만나러 떠났습니다. 아파트 주변에는 하얀 목련이 환하게 미소를 보여 주었고

근처 야산에는 진달래의 붉은 색이 보이긴 했지만 초점이 맞지 않은 풍경화처럼 내 곁을 빠르게 지나갈 뿐이었습니다.


비는 멎었지만 바람은 제법 차가웠습니다. 옷섶을 헤집고 들어오는 바람 때문에 가벼운 차림으로 그녀를 찾아 온 것을

금방 후회했지만 마음은 설렘으로 가득 찼습니다. 논둑을 지나 숲으로 몇 걸음 들어가자 상큼한 풀 향기가 느껴졌습니다.

긴긴 겨울을 이기고 세상 밖으로 고개를 내밀자마자 내 발에 밟힌 잡초의 새순이 나의 실수를 꾸짖는

대신 자신들의 독특한 향기로 항변을 하고 있었습니다.


많은 세월이 흘러 첫사랑 그녀의 모습이 가물거리듯, 지난 해 만났던 미선이란 꽃의 윤곽도 가물거렸지만

나는 백색의 그녀를 만났습니다. 순간 가슴에 작은 등불이 환하게 켜졌습니다.


미선과의 만남을 시샘이라도 하듯 쉬지 않고 불어대는 바람에 그녀의 모습을 카메라에 담을 수가 없었습니다.

바람에 실려 오는 진한 꽃향기를 음미하면서 마치 첫사랑 그녀가 곁에 있다는 착각이 들었습니다. 방금 목욕을 마친

여인처럼 미선은 싱그러웠고, 향기는 나의 온 몸을 감고 돌았습니다. 작은 꽃은 조금 전까지 내렸던 봄비로 인해

생기가 넘쳤습니다. 구름사이로 고개를 내민 햇살로 그녀의 살결은 우윳빛으로 반짝거렸습니다. 눈이 부셨습니다.

그녀가 흔들리는 것은 바람 때문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나를 만난 반가움을 온 몸으로 표현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봄이 되면 꽃소식을 전해주는 눈 맑은 여인에게 감사를 드립니다. 미선이란 꽃이 피었다는 전화를 받고 비가 그치자마자

달려가서 만난 그 순간이 너무 행복했습니다. 그 꽃이 내가 살고 있는 서산의 작은 야산에 많은 들꽃과 함께 피어있는 것이

정말 보기 좋았습니다. 온갖 꽃들이 서로 다투어 피고 있는 봄의 한 가운데에 그녀는 충분히 특별했습니다.


오늘 밤, 침대에서 혹시나 잠꼬대를 할까봐 걱정입니다. 아직까지 비밀로 간직한 ‘미선’이란 여인과의

이야기는 오래도록 숨겨두고 싶네요.


미선나무는 개나리와 같은 물푸레과의 관목으로 우리나라에서만 자라는 희귀한 나무입니다.

충북 괴산과 전북 부안의 자생지는 천연기념물로 지정하여 보호하고 있습니다. 열매의 모양이 선녀의 부채를 닮아

미선(尾扇)나무라는 이름이 붙여졌습니다.

<서산교차로 현동선 리포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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