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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제목 처녀치마 _ 야생화편지 29.
작성자 서산교차로
등록일 15/05/08(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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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곡을 지키는 요정, ‘처녀치마’

 

밤새 봄비가 창문을 요란하게 두드리며 시끄럽게 내렸습니다. 아직도 잠을 자고 있는 늙은 자귀나무를 깨우려고 했는지

천둥도 요란하게 쳤습니다. 비개인 아침, 보도와 도로의 경계에는 떨어진 꽃잎들과 밤새 날려 온 송홧가루가 엉켜서

새로운 그림을 그려 놓았습니다. 넓은 들판에도 노랗던 민들레들이 지금은 모두 하얀 모자를 쓰고 바람을 기다리며

여행준비를 하고 있습니다. 화장을 하지 않은 시골 여인 같은 수수한 차림의 산벚꽃도 하얀 꽃잎을 떨어뜨리고

겨우내 숨어있던 파란 잎들을 내밀며 여름이 바로 코앞에 와 있다고 소근 거립니다.


예쁘게 피어있다는 새우란을 찍으러 숲을 헤집고 다니다 보니 가슴과 등에 땀이 흘러 내렸습니다. 앞이 훤히 트인 능선에

오르자 골을 타고 올라오는 봄바람이 온 몸을 시원하게 식혀 주었습니다. 바람은, 막 잎을 내밀은 연한 나뭇잎을

흔들어대며 상큼한 녹색의 향을 가득 담고 내 가슴을 휘젓고 지나갔습니다. 그 바람 속에, 앞산 계곡에

그토록 보고 싶어 하는 처녀치마가 피었다는 이야기가 숨어 있었습니다.


지난해부터 처녀치마를 찍으려고 몇 번이나 산에 올랐습니다. 하지만 꽃은 무작정 찾아 나선다고 해서 아름다운

모습을 담을 수 있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 시기를 잘 맞추지 못하면 만날 수는 있을지 몰라도 아름다운 자태를 담을 수

없을 때가 많았습니다. 직장을 갖고 있는 나로서는 주말을 이용해서 산과 계곡을 다니지만 꽃은 늘 나를 기다렸다가

그 시기에 피어있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헛걸음을 했다고 실망하지는 않았습니다.

그 꽃과 약속을 하고 간 것이 아니고 일방적인 내 계획에 맞추어 찾아간 나의 잘못이 많으니까요.

 

어쩌다 꽃 소식을 접하고 조바심에 휴가를 내어 그곳을 찾으면 일부 욕심이 많은 사람들이 그 꽃을 캐어 간 후여서

실망을 한 적도 많았답니다.


일찌감치 정원에 피어있던 매발톱이 말라서 시들어가고, 봄비를 맞은 참나리의 싱싱한 새순에는 백합벌레들이 모여서

사랑을 나누고 있었습니다. 예전 같으면 손가락으로 튕겨내서 저 멀리 보냈겠지만 이번에는 그냥 놔두었습니다.

그들의 사랑을 방해하는 것도 미안했고, 한편 그들의 애벌레인 새똥벌레가 참나리를 먹어봐야 얼마나 먹겠냐는

여유가 생기기도 한 탓이랍니다. 하지만 꽃이 나오는 곳에 앉아서 계속 새순을 먹어댄다면 아마도 나의 인내심도

바닥을 드러낼 것 같은 예감이 듭니다.


이른 봄부터 여름의 문턱까지 수많은 꽃들이 피고 지기를 반복하며 나를 함께 있게 한 봄꽃들의 이름을 불러봅니다.

바람꽃, 현호색, 봄까치꽃, 길마가지나무꽃, 미선나무꽃 모두가 내가 좋아하는 봄꽃들입니다.

어느 소설가의 어머니는 ‘신춘문예 소설부문’에 당선된 딸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네가 소설을 쓰는 이유가 무엇인지 잊지 않도록 해라.”

나는 산을 오르고 계곡을 넘나들면서 꽃을 만나면 카메라의 셔터를 누르는 이유를 아직도 정확히 알 수 없습니다.

누가 물어보면 “그냥 꽃이 아름다워서요” 라고 간단히 대답을 합니다.


가끔은 꽃을 만나면 셔터를 누르지 못하고 바라만 본 적도 있습니다.

다소곳이 미소를 머금고 있는 꽃송이 앞에 커다란 카메라를 들이대면 깜짝 놀랄 것 같아서입니다.


오늘도, 처녀치마의 소식을 듣고 달려갔지만 카메라에 담지는 못했습니다. 꽃대가 올라오다가 지난 밤 천둥에 놀라서

성장을 멈추었나 봅니다. 사람의 만남처럼 늘 때가 있는 것인데 나 혼자 약속을 하고 몇 번씩 찾아갔지만 그녀가

외면했기 때문입니다. 다행히 ‘맑음’이라는 닉네임을 가진 여인이 이 꽃을 담아서 보내 왔습니다.

 

주변에 이렇게 나의 부족한 사정을, 아쉬운 마음을 잘 알고 있는 사람들이 있어서 행복합니다.

길게 늘어진 긴 치마, 아름다운 꽃을 보면 왜 제가 그 꽃에 집착을 하는지 공감을 하실 것입니다.

그 꽃을 보면 어릴 때 이사 간 옆집의 작은 소녀가 어렴풋이 떠오른답니다.

<서산교차로 현동선 리포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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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이 오면 봄이 멀지 않으리. -셸리